夜… 갈치밭에 漁火둥둥… 거문도
에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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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을 나와 다시 숲속으로/나는 천국에서 걷는 걸음을 모르지만/이런 길은 이렇게 걸을 거다/가다가 하늘을 보고 가다가 바다를 보고/가다가 꽃을 보고 가다가 새를 보고/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머리로 고민하지 않아도/웬일로 나를/나무가 꽃이 새가 혹은 벌레가/아직 살아 있는 나를/행복의 길로 몰고 가는지 모르겠다/너무 행복해서 죄스럽다/까닭 없이 내게만 편중된 행복/남들이 시기하겠다/사람들에게 매맞겠다/사랑도 속박이니/지나친 행복도 구속이니/다시 슬프고 외롭게 해다오’(이생진의 ‘거문도 등대로 가는 길 1’)
거문도 등대로 가는 길은 이생진 시인의 표현처럼 너무 행복해서 죄스럽다.
고도와 서도를 연결하는 삼호교를 건너 유림해수욕장의 고운 모래밭을 따라 걸으면 물이 넘나든다는 무넹이(목넘어)를 만난다. 국내 최대의 해마 서식지인 삼호교 아래를 오가는 어선들의 중저음 뱃고동이 수면을 내달릴 때마다 쪽빛 파도는 무시로 무넹이의 갯바위에 부딪쳐 하얗게 부서진다.
수월산 선착장에서 거문도 등대까지 1.3㎞ 길이의 산책로는 울창한 동백나무 숲이 터널을 이룬다. 서럽도록 붉은 동백꽃이 송이째 뚝뚝 떨어져 산책로를 수놓는 이른 봄에는 행여 꽃송이를 즈려밟을까 발목을 잡더니 이제는 동백나무 틈새로 언뜻언뜻 보이는 거문도의 절경이 발걸음을 더디게 한다.
손바닥 크기의 납작한 돌을 깔아 만든 산책로는 동백나무 검팽나무 돈나무 후박나무 다정큼나무 등 난대성 상록수가 하늘을 가려 바다 속처럼 어둑컴컴하다. 동박새와 직박구리의 노랫소리를 이정표 삼아 저물어가는 숲길을 걷다보면 비로소 하늘이 열린다.
숲길이 어느새 부드러운 흙길로 바뀌더니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순백의 거문도 등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생진 시인이 ‘거문도 등대로 가는 길 4’의 시상을 얻은 곳이 이쯤이리라.
‘여기서 등대가 보이지만/등대까지는 아직도 멀다/한번쯤 숲 밖에 나와 있다 숲속으로 들어가고/등대는 어디서 보나 외로운 시인상/…’
낮과 밤의 경계에서 거행되는 태양과 등대의 임무 교대식은 한 편의 서정시이자 한 폭의 풍경화다.
수월산의 까마득한 절벽 위에 홀로 우뚝 솟은 거문도 등대가 저녁노을에 물든다. 바다와 등대를 오렌지색으로 물들인 태양이 수평선 아래로 서서히 가라앉으면 붉게 타오르던 구름이 일순간 포도주색으로 변한다. 외로운 등대지기가 100년 전처럼 불 밝힐 준비를 한다. 포도주색 구름이 잿빛으로 변하고 다시 잿빛 구름에 암청색 물감이 덧칠해진다.
거문도 등대가 어두워지기 시작한 바다를 향해 가느다란 빛줄기를 쏘아 보낸다. 화답이라도 하듯 수평선 너머의 은갈치잡이 어선들이 집어등을 환하게 밝히고 짙은 먹구름 속에 숨어있던 별들도 초롱초롱 빛을 쏟아낸다. 삼호팔경 중의 으뜸인 홍국어화(紅國漁化)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수월산 해안 절벽에 자리잡은 거문도 등대가 처음으로 불을 밝힌 때는 1905년 4월 10일. 남해안 어업전진기지이자 국제항로인 거문도 앞바다를 항해하는 배들에게 길잡이 역할을 한 지 어언 100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흘렀다.
해양수산부는 거문도 등대 100주년을 맞아 2년간의 난공사 끝에 지난 8월 1일 새 등대를 선보였다. 전망대를 겸한 새 등대의 높이는 구 등대(6.4m)보다 훨씬 높은 34m. 해면으로부터 약 100m 높이다. 154개의 나선형 계단을 올라 전망대에 서면 거문도는 물론 삼부도 백도 등 인근의 섬들이 손에 잡힐 듯 한눈에 들어온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관리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등대의 드넓은 잔디밭을 없애버리고 적벽돌로 포장한 것이라고나 할까.
거문도 등대에서 맞는 해돋이도 해넘이 못지않게 감동적이다.
모래알처럼 무수한 별빛이 하나 둘 스러지고 은갈치잡이 어선들이 만선의 기쁨을 안고 속속 여명에 물든 거문도항으로 귀항한다. 밤을 하얗게 지새운 거문도 등대가 불을 끄고 휴식에 들어가면 거문도 동쪽 28㎞ 해상에 위치한 백도가 희미한 모습을 드러내면서 빛의 잔치를 준비한다.
상백도의 등대섬에서 솟은 태양은 붉다 못해 하얗게 빛난다. 백도를 감싼 구름은 용광로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고 태양이 만든 황금색 빛줄기는 백도에서 거문도 등대까지 신비의 바닷길처럼 황금색 띠를 만든다. 거문도항에서 옅은 해무를 뚫고 마중 나온 갈매기들이 어선과 함께 황금빛 바다에서 춤을 추는 장면도 가슴에 새겨 넣고 싶은 풍경.
거문도 등대는 한낮의 풍경도 아름답다. 백도가 보인다고 해서 관백정(觀白亭)이라고 불리는 절벽 위 정자에 서면 백도는 물론 맑은 날에는 제주도 한라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밀려오는 파도가 절벽에 부딪치는 규칙적인 소리는 병사들의 행진을 독려하는 북소리처럼 장엄하고,초도 삼부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수평선을 향해 사방팔방 징검다리처럼 이어지는 풍경은 빛바랜 사진처럼 정겹다.
~
여수(거문도)=글·사진 박강섭 기자 kspark@kmib.co.kr
거문도 등대로 가는 길은 이생진 시인의 표현처럼 너무 행복해서 죄스럽다.
고도와 서도를 연결하는 삼호교를 건너 유림해수욕장의 고운 모래밭을 따라 걸으면 물이 넘나든다는 무넹이(목넘어)를 만난다. 국내 최대의 해마 서식지인 삼호교 아래를 오가는 어선들의 중저음 뱃고동이 수면을 내달릴 때마다 쪽빛 파도는 무시로 무넹이의 갯바위에 부딪쳐 하얗게 부서진다.
수월산 선착장에서 거문도 등대까지 1.3㎞ 길이의 산책로는 울창한 동백나무 숲이 터널을 이룬다. 서럽도록 붉은 동백꽃이 송이째 뚝뚝 떨어져 산책로를 수놓는 이른 봄에는 행여 꽃송이를 즈려밟을까 발목을 잡더니 이제는 동백나무 틈새로 언뜻언뜻 보이는 거문도의 절경이 발걸음을 더디게 한다.
손바닥 크기의 납작한 돌을 깔아 만든 산책로는 동백나무 검팽나무 돈나무 후박나무 다정큼나무 등 난대성 상록수가 하늘을 가려 바다 속처럼 어둑컴컴하다. 동박새와 직박구리의 노랫소리를 이정표 삼아 저물어가는 숲길을 걷다보면 비로소 하늘이 열린다.
숲길이 어느새 부드러운 흙길로 바뀌더니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순백의 거문도 등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생진 시인이 ‘거문도 등대로 가는 길 4’의 시상을 얻은 곳이 이쯤이리라.
‘여기서 등대가 보이지만/등대까지는 아직도 멀다/한번쯤 숲 밖에 나와 있다 숲속으로 들어가고/등대는 어디서 보나 외로운 시인상/…’
낮과 밤의 경계에서 거행되는 태양과 등대의 임무 교대식은 한 편의 서정시이자 한 폭의 풍경화다.
수월산의 까마득한 절벽 위에 홀로 우뚝 솟은 거문도 등대가 저녁노을에 물든다. 바다와 등대를 오렌지색으로 물들인 태양이 수평선 아래로 서서히 가라앉으면 붉게 타오르던 구름이 일순간 포도주색으로 변한다. 외로운 등대지기가 100년 전처럼 불 밝힐 준비를 한다. 포도주색 구름이 잿빛으로 변하고 다시 잿빛 구름에 암청색 물감이 덧칠해진다.
거문도 등대가 어두워지기 시작한 바다를 향해 가느다란 빛줄기를 쏘아 보낸다. 화답이라도 하듯 수평선 너머의 은갈치잡이 어선들이 집어등을 환하게 밝히고 짙은 먹구름 속에 숨어있던 별들도 초롱초롱 빛을 쏟아낸다. 삼호팔경 중의 으뜸인 홍국어화(紅國漁化)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수월산 해안 절벽에 자리잡은 거문도 등대가 처음으로 불을 밝힌 때는 1905년 4월 10일. 남해안 어업전진기지이자 국제항로인 거문도 앞바다를 항해하는 배들에게 길잡이 역할을 한 지 어언 100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흘렀다.
해양수산부는 거문도 등대 100주년을 맞아 2년간의 난공사 끝에 지난 8월 1일 새 등대를 선보였다. 전망대를 겸한 새 등대의 높이는 구 등대(6.4m)보다 훨씬 높은 34m. 해면으로부터 약 100m 높이다. 154개의 나선형 계단을 올라 전망대에 서면 거문도는 물론 삼부도 백도 등 인근의 섬들이 손에 잡힐 듯 한눈에 들어온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관리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등대의 드넓은 잔디밭을 없애버리고 적벽돌로 포장한 것이라고나 할까.
거문도 등대에서 맞는 해돋이도 해넘이 못지않게 감동적이다.
모래알처럼 무수한 별빛이 하나 둘 스러지고 은갈치잡이 어선들이 만선의 기쁨을 안고 속속 여명에 물든 거문도항으로 귀항한다. 밤을 하얗게 지새운 거문도 등대가 불을 끄고 휴식에 들어가면 거문도 동쪽 28㎞ 해상에 위치한 백도가 희미한 모습을 드러내면서 빛의 잔치를 준비한다.
상백도의 등대섬에서 솟은 태양은 붉다 못해 하얗게 빛난다. 백도를 감싼 구름은 용광로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고 태양이 만든 황금색 빛줄기는 백도에서 거문도 등대까지 신비의 바닷길처럼 황금색 띠를 만든다. 거문도항에서 옅은 해무를 뚫고 마중 나온 갈매기들이 어선과 함께 황금빛 바다에서 춤을 추는 장면도 가슴에 새겨 넣고 싶은 풍경.
거문도 등대는 한낮의 풍경도 아름답다. 백도가 보인다고 해서 관백정(觀白亭)이라고 불리는 절벽 위 정자에 서면 백도는 물론 맑은 날에는 제주도 한라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밀려오는 파도가 절벽에 부딪치는 규칙적인 소리는 병사들의 행진을 독려하는 북소리처럼 장엄하고,초도 삼부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수평선을 향해 사방팔방 징검다리처럼 이어지는 풍경은 빛바랜 사진처럼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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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거문도)=글·사진 박강섭 기자 kspark@kmib.co.kr